후쿠시마현 이타테 마을의 칸노 히로시 씨(65세)는 1948년, 2차세계대전 후 농부로 정착한 아버지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1967년 후쿠시마 소마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가업을 이어 농부가 됩니다. 이타테 마을에서 35가지의 다양한 채소를 일궈왔던 그는 원전사고 이후 후쿠시마 시에서 10km 떨어진 곳에서 새로이 농사를 시작했습니다.

“저는 땅이 베푸는 것을 받으며 살아온 일본 농민입니다. 후쿠시마 원전 1호기에서 엄청난 폭발이 있은 후, 많은 양의 방사능이 방출되면서 저는 고향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당시 까마득한 절망감을 느꼈던 저는 이제 분노를 감출 수 없습니다. 그래야 농부로서의 저의 삶을 지킬 수 있고 고향 땅에서도 쫓겨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원전 사고가 난 후, 저는 5월에 대피했습니다. 지금은 후쿠시마 시내에서 집을 임대해서 지내고 있습니다. 저는 소마시, 이다테시, 그리고 쿠니미 마을에 땅을 임대해 피난 온 사람들과 함께 협동농업을 하고 있습니다.

또, 마을사람들을 주도해 농산물을 전통적 방식으로 가공하는 일도 추진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더이상 후쿠시마에서 떡, 절인 양배추 또는 된장을 만들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전통 방식으로 농산물을 가공하는 법을 전수해 우리의 문화가 깃든 음식을 보존하려 합니다.”

3월 11일, 그리고 우리의 현실

“3월 11일, 이타테 마을이 좀 흔들리긴 했지만, 기반암 위에 위치한 터라 가옥에 미친 피해는 미미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날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에서 사고가 난 것입니다. 사고가 난 지점부터 20km 안에 위치한 미나미 소마 및 후타바의 주민들은 우리 이타테 마을로 피난을 왔습니다.

저희 마을은 피난소를 세우고 100명이 넘는 주민들을 수용했습니다. 14일과 15일, 연달아 또 다른 폭발이 있었고, 15일과 16일일에는 고농도 방사능이 포함된 비와 눈이 이타테 마을을 덮쳤습니다.

후쿠시마현이 조사하고 모니터링 한 결과, 15일 저녁에는 공기 중에 시간당 44.7 마이크로 시버트(micro Sieverts)라는 충격적인 방사능 수치가 측정되었습니다. 이런 사실은 그저 텔레비전을 통해 단 한번 자막으로 전달되었을 뿐입니다. 그 날, 저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동사무소에서 근무하는 지인에게 전화했고, 인근 주민들을 대피시켜야 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도쿄전력에서 일하는 젊은 직원이 트위터에 올린 정보를 보고 주민들은 마을 동사무소로 몰려가 대피시켜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주민들의 요구에 동사무소 직원들은 중앙정부나 현 차원에서 어떤 지시도 없었다는 대답만 되풀이 했습니다.

주민들은 공무원들의 이런 태도에 분노했고 더 이상 이들을 믿을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대피하기로 결정하고 다른 이들에게도 대피를 권고했습니다.

19일과 20일, 마침내 현 차원에서 자진 대피를 원하는 약 350명의 주민들을 위해 버스를 대절했고, 이들은 모두 토치기 현에 위치한 카누마 시로 대피했습니다.

그러다 수돗물에서 방사능 물질이 검출되었습니다.(965 Bq) 수돗물은 바로 끊겼고 각 가정마다 생수가 배달되었습니다. 주민들은 지속적으로 방사능에 노출되고 있었고 방사성 요오드에 오염된 물을 1주일 이상 마신 상태였습니다.

당국은 25일 나가사키 대학 타카무라 노보루 교수를 초청해 강연을 열었습니다. 타카무라 교수는 400명의 주민 앞에서 안전과 관련해 떠돌고 있는 소문을 종식시키려, 아이들은 밖에서 놀아도 되고 빨래를 실외에 널어 놓는 것도 괜찮다고 말했습니다. 먼지만 털어내면 괜찮다는 거죠. 그리고 음식물도 안전하니 마음 편히 일상생활을 하라고 말했습니다.

3월 28일과 29일, 교토 대학 원자로실험소 이마나타 테츠지 조교수가 마을의 오염 정도를 조사하기 위해 방문했습니다. 그리고 31일, 원자력산업안전공단이 이타테 마을 주민들은 대피할 필요가 없다고 발표했습니다. 이마나카 교수는 자신의 조사결과에 기초해 마을 이장에게 대피를 권고했지만, 이장은 그의 조사결과가 공식적인 정부의 입장이 아니므로 주민들을 대피시킬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4월 10일, 교육위원회는 킨키 대학의 스기우라 레이코 교수의 강의를 위해 천 명이 되는 주민을 소집했습니다. 물론 그녀도 안전하다는 미신을 우리에게 주입하기 위해 온 사람이었죠. 모든 것이 안전하고 괜찮다는 발표에도 불구하고, 바로 다음날 정부는 이타테 마을을 계획 대피구역으로 지정했습니다. 이에 따라 마을 주민들은 5월 말까지 대피를 해야 했습니다. 주민들은 가족같이 기르던 가축을 없애고 떠나야 했습니다.”

원전사고로 고향을 떠나 대피한 지역 인근에서 농사를 짓는 칸노 히로시 씨

임시 숙소에 머물고 있는 이타테 주민들

“이타테 마을은 후쿠시마 다이치 원전에서 30 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지만, 원전이 폭발한 후 바람이 우리 마을 쪽으로 불면서 고농도 방사능 분진이 저희 마을을 뒤덮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마을 주민들이 대피해야 했죠.

6,200 명의 주민들이 후쿠시마현 안팎으로 강제 대피를 한 지 3년이 되어 갑니다. 우리는 모두 고통, 분노, 참담한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우리를 더욱 슬프게 하는 건, 이타테 마을이 너무나 아름다운 곳이었다는 점입니다.”

풍요로운 농지에서 쫓겨나

“풍요로운 자연환경 덕에 이타테 마을은 독특한 음식문화로 유명합니다. 봄이 되면 산은 머위와 산나물로 덮이고, 가을식탁은 풍성한 버섯들로 가득 찹니다. 이런 특별한 음식 문화는 떡, 두부, 일본 무와 피클 등의 음식을 가공하는 방식에서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국가의 주요 근간인 농업에 불이익을 주는 정책에도 불구하고, 주민들은 안간힘을 다해 우리의 땅을 지키고 개간해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방사능에 노출되었고 임시 대피소에 머물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지워진 이 마음의 짐은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무겁습니다. 지난 3년 간, 사랑하던 땅에서 쫓겨난 후 목숨을 잃은 이타테 마을 주민만 200명이 넘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만 생각해도 제 마음은 슬픔으로 가득 찹니다.”

불안과 염려로 점철된 나날들  

“이타테 마을에서 여러 세대가 한 집에 같이 사는 것은 매우 흔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임시 대피소에 있다는 이유로, 일의 원활한 처리를 위해, 대피한 시기가 다르다는 이유로 모두 헤어져 따로 지내고 있습니다.

많은 노인들이 임시 대피소에 머물고 있고, 젊은 부부와 자녀들은 멀리 떨어진 시내에 머물고 있습니다. 노인들은 더 이상 손주들의 활기찬 목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서로 다른 대피소에서 지내고 있어, 같은 마을에서 대피해 온 사람들조차도 서로 얼굴 보기 힘듭니다. 이 임시 대피소는 너무 많은 사람들을 수용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2개의 작은 방과 부엌이 전부이며, 옆집과 우리를 나누는 것은 얇은 벽 하나가 전부입니다. 게다가 농사일을 할 수 없는 상황이니, 몸을 규칙적으로 움직이지 않게 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쉽게 건강을 잃고 있습니다.  

아무리 그 전에 좋은 집이었다 해도, 사람이 살지 않기 시작하면 썩기 마련입니다. 마을도 마찬가지 입니다. 이런 상황을 보는 우리의 심정은 고통 그 자체입니다. 상황이 이러니, 시간이 흐를수록 주민들은 마을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제염작업이 진행되고 있긴 하지만, 과연 주민들이 마을에서 안전하게 살 수 있을 정도로 방사능 수치가 떨어질까요? 정부에서 발표한 기준이 정말 안전할까요? 이 기준을 믿고 젊은 사람들이 돌아올까요? 마을로 돌아갈 수 있게 되면, 보상금 지급은 중단될까요? 농사지은 작물을 판매 할 수 없으면, 몇 푼 되지 않는 연금에 의지해서 살아야 할까요? 마을 주민들의 불안은 시간이 갈수록 그저 깊어질 뿐입니다."

하루 하루를 견딜 힘과 의지 

"점점 많은 사람들이 임시 대피소 주변에 있는 땅을 임대해 야채를 기르고 있습니다. 주민들은 이렇게 농사를 지으면서 방사능에 대한 두려움과 염려를 떨쳐 버리려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마을에서 살 때 농사일이 얼마나 즐거웠었는지도 기억해내려 합니다. 씨를 뿌리면 싹이 나고, 맛있는 채소로 자라면 수확해 먹었던 그 즐거움. 마을주민들은 태양에 감사하며, 땅이 그들에게 베풀었던 기쁨을 간직한 채 하루 하루를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자신들의 삶과 마을이 썩은 동아줄에 매달려 있는 것 같은 현실에서 하루 하루를 버텨내기 위한 방법일 뿐입니다. 원전만 없었다면, 없었다면… 도대체 언제가 되면 이런 원망이 사라질까요? 우리는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일의 결과때문에 남은 여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 지 선택해야 합니다. 살아가기 위해, 치열하고 단호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원전사고로 고향을 떠나 대피한 지역 인근에서 농사를 짓는 칸노 히로시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