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청년, 드디어 에스페란자호에 승선하다

교통사고처럼 찾아 온 인생의 반전

Feature Story - 2015-12-07
드디어 그린피스 국제본부와 연락이 닿은 김연식 항해사의 이야기. 그는 당시를 회고하며 마치 교통사고처럼 뜬금없이 다가왔다고 이야기합니다. 도전하고 시도하고 패배하고 실패하다가 7전8기로 무언가를 성취했을 때의 짜릿함이 좋다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지난 편 “서른셋 한국 청년, 에스페란자에 끌리다” 보기]

그 사이 뜨거웠던 마음은 점점 식어버렸다. 가만 생각하니 내가 원한다고 해서 바로 에스페란자에 승선할 수 있다고 믿은 것 자체가 어리석었다. 세상에 뜻대로 척척 되는 일이 어디 많겠는가. 제 방귀조차 뜻대로 되지 않아 망신을 사는 판에 말이다.

평생 열심히 잘 살아왔으니 나를 둘러싼 모든 걸 통제할 수 있다고, 그래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 많다. 나 역시 그랬다. 내가 하고 싶은 건 다 해야 한다고, 내 주변은 내 뜻대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랑, 일, 꿈, 그리고 일상조차도 내가 완벽하게 주무를 수 없다. 주방에서 칼에 손가락을 베거나, 운전하다 사고가 나거나, 문틈에 손가락을 찧거나, 아차 하는 순간 커피를 엎거나 넘어지고 나서야 우리는 세상이 뜻대로 되는 게 아님을 아프게 깨닫는다.

칠레 발파라이소 항에 도착해 정박하고 있는 에스페란자호
칠레 발파라이소 항에 도착해 정박하고 있는 에스페란자호


‘세상은 내 뜻대로 되는 게 아니야’로 식어진 마음

나는 이런 생각을 핑계 삼아 뜨거워진 마음을 슬슬 거두기 시작했다. 당시 나는 상선을 오래 타고 내려 3개월간 휴가를 보내고 있었고, 일하던 회사에서는 다음 승선 일을 잡아 놨다. 마침 선원 교대가 늦어져 10월 초순까지 한국에 머물게 되었다. 이제 며칠 후면 다시 부정기 화물선에 오른다. 나는 군 입대를 앞둔 것처럼 아무것도 못하고 승선 일만 기다리며 지루한 나날을 보냈다.

그날도 그런 나날의 어디쯤이었다. 정말 무료해서 뜬금없이 우박이라도 한 대 맞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도 심심해서 선박에서 9개월을 같이 보낸 동료 선원을 만나러 나갔다. 이건 휴가 나온 군인이 서울에서 군 동료를 만나는 겪이랄까. 노량진 육교 근처 커피집에서 남자 둘이 어색하게 앉아있는데 정말 고맙게도 휴대전화 벨이 울렸다. 아주 요란하게 말이다. 이런 어색한 때에 누가 나를 찾아주나 반가워서 전화기를 꺼냈는데 네덜란드 번호였다.

-우리 선원 중에 네덜란드에 기항한 사람이 있나?
-보이스피싱 조직이 중국을 넘어 네덜란드까지 간 모양인데?

짧은 순간에 여러 생각이 몰려왔다. 보이스피싱 조직이면 어떻게 약 올릴까 생각하며 통화버튼을 누르는데 뜻밖의 말이 나왔다.

-Good morning, This is Greenpeace international.


교통사고처럼 찾아 온 인생의 반전

숨은 진작 멎었고, 나는 이 때 난생 처음으로 2초쯤 시간이 멈추는 희귀한 경험을 했다. 그리고 답했다.

-아, 옛쓰 옛쓰. 디쓰이즈 김연식. 아... 굿모닝, 아... 굿모닝... 땡큐 땡큐.

초라한 몇 가지 영단어가 입 밖으로 튀어 나왔다. 식어가던 열정이 몇 초 사이에 기름 부은 것처럼 후끈 타올랐다.

그 길로 몇 가지 이메일을 주고받고, 건강검진 같은 몇 가지 절차를 거쳐 나는 지금 에스페란자에 앉아있다. 한국인 첫 그린피스 항해사가 된 것이다. 누가 그랬다. 인생은 교통사고 같은 거라고. 교통사고처럼 뜬금없이 걸려온 전화. 그 전화 한통으로 나는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홀로 인천공항에 가서 비행기를 타고,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내려 본부 사무실에 찾아가고, 다시 비행기를 타고 파나마까지 날아갔다. 내 삶이 급반전한 것이다. 지구 반 바퀴를 서울에서 부산 가듯이 아무렇지 않게 하는 나를 보며, 문득문득 진짜 내가 아닌 것 같아 의아한 때가 많았다.

칠레 중남부와 아르헨티나 파타고니아 지방에 걸쳐 살고 있는 아메리카 대륙 마푸체(Mapuche) 원주민 일부 그룹이 에스페란자호를 방문해 기원하고 있는 모습. 김연식 항해사도 함께 하고 있다.
칠레 중남부와 아르헨티나 파타고니아 지방에 걸쳐 살고 있는 아메리카 대륙 마푸체(Mapuche) 원주민 일부 그룹이 에스페란자호를 방문해 기원하고 있는 모습. 김연식 항해사도 함께 하고 있다.

 

교통사고도 이부자리를 걷어차고 길바닥으로 나와야 일어난다

모든 것이 계획되어 있고, 내가 통제하는 대로 진행되며, 그것이 정해진 대로 될 거라는 믿음. 그 안에서 우리는 행복하다. 하지만 때로 그 행복은 지루함의 뿌리인지도 모른다. 충분히 평화롭고 안정적인 그 달콤함이 나는 유독 싫다. 도전하고 시도하고 패배하고 실패하다가 7전8기로 무언가를 성취했을 때의 짜릿함이 나는 좋다. 멀쩡히 상선 항해사로 일하다가 엉뚱하게 그린피스의 꿈을 품고, 그게 안 되어서 혼자 쩔쩔매다가 아주 운 좋게 기회를 얻었다. 만일 회사의 교대가 늦춰지지 않아서 본래 일정대로 상선에 승선했더라면 나는 이 전화를 받지 못했을 것이다. 인생을 반대 방향으로 바꿔놓은 전화는 아주 뜬금없이, 생각지도 못한 때에 걸려왔다.

어른들의 말처럼, 정말이지 사람 앞날은 아무도 모르는 모양이다. 대학에서 신문방송학을 전공하고, 졸업과 동시에 신문기자로 일한 내가, 엉뚱하게 청년백수가 되어 직업전문학교에서 자동차 정비를 배우다가, 그보다 엉뚱하게 배를 탔고, 그보다 어처구니없게 책을 쓰고, 국제환경단체에서 일하게 되었으니 이건 정말이지 나는 물론 내 할아버지조차 짐작 못한 여정이다. 다만 중요한 것은 교통사고도 이부자리를 걷어차고 길바닥으로 나와야 일어난다는 것. 안정적인 상선 항해사 생활을 걷어차고 생경한 영어로 자기소개서를 썼기에 엉뚱한 기회가 생기지 않았는가.

A Mapuche community visits the Esperanza ship to make a "rogativa"- praying to the earth- for the crew and the enviroment. Valparíso, December 2015. Chile 

 

* 다음 편에서는 에스페란자호가 칠레에 방문한 이유를 소개해드립니다. 기대해주세요.

 

글: 김연식 / 그린피스 환경감시선 에스페란자호 3등 항해사

카테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