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세가와 켄이치(60세) 씨는 후쿠시마현 이타테 마을에서 낙농업을 해왔지만, 사고 이후 후쿠시마 시내에서 북동쪽으로 15km 떨어진 다테시에 살고 있습니다. 장성한 아들과 두 손주를 둔 그는 전과는 달리 가족들과 함께 살아갈 수 없습니다.

하세가와씨는 외양간 안에 있는 나무로 된 칠판에 분필로 매년 첫눈을 기록하곤 했습니다. 잘 정리된 날짜들 중 마지막 기록은 2011년이었습니다. 그는 이제 첫눈 날짜 대신 자신의 고향을 수백 장의 사진과 비디오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일을 이타테에서 피난 나온 2011년 4월 22일부터 시작했는데, 그 끝이 언제일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나는 당신들의 기니피그가 아니다

이타테는 후쿠시마현에 있는 많은 마을 가운데 강제로 이주를 해야 했던 곳 중 하나입니다. 방사능 수치가 높아 안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같은 장소에서 ‘정밀하게 기록’하는 것만이 사고 후에도 그가 지속하는 유일한 것입니다. “그곳에서 저는 마을 전체를 바라보고, 계절에 따라 집들과 벼 이삭이 변해가는 모습을 볼 수 있지요.”

그는 다테의 임시 피난소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영상으로 담기도 합니다. 그는 이곳에서 아내와 부모님을 모시고 3년 가까이 살았습니다. 임시 피난소에는 126개 피해 가구들이 함께 살고 있는데, 이 중 스물 네 가정만이 하세가와 씨와 같은 지역에서 온 사람들입니다. 다른 서른 가정은 이곳 저곳으로 흩어졌습니다. “제가 가장 그리운 것은 모든 가족들과 함께 살아가는 거예요. 같은 집에 있는 거죠. 우리는 매일 아침 6시만 되면 함께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소들을 돌보고 부엌일도 함께 했지요. 지금은 다 뿔뿔이 흩어졌어요. 제 막내 아들은 다테시 어딘가에서 살고 있고, 첫째는 야마가타현에서 아이들과 있지요. 마지막으로 본 게 새해였어요.” 4세대에 걸친 가족들은 오래된 집에서 함께 살았습니다. 바로 옆에 외양간이 있었고, 굽이치는 언덕과 논들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이었습니다. “제 고향은 사라졌어요. 저는 수확을 할 수 없는 농부입니다. 우리가 이 재난을 통해 잃은 것들을 이루 묘사할 수도 없어요.”

사람들이 땅이 심각하게 오염돼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이타테로 피난을 오고 있을 때, 정부 당국이 은폐하려는 방사능 수치에 대해 처음으로 문제제기를 한 장본인이 바로 하세가와씨였습니다. “다른 지역에서 온 피난민들은 미심쩍어하는 눈치라도 있었어요.” 하지만 중앙정부는 그가 ‘프로파간다 교수들’이라 부르는 사람들을 이타테로 보냈습니다. 나가사키 대학에서 온 야마시타 교수는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소위 말하는 ‘방사능 안전 강연’을 열었습니다. “그 사람은 사람들에게 여기 머무는 것이 안전하다고 안심시켰어요.” 방사능이 아이들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묻자 교수는 “한 시간만 밖에서 놀게 하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그는 계속해서 “정부는 바르게 말하고 있다. 여러분은 정부를 믿어야 한다. 나는 박사이자 과학자이다. 나를 믿어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심지어 “방사능은 부정적인 사람들을 좋아한다. 만약 여러분이 방사능을 걱정한다면 그게 당신에게 영향을 끼칠 것이다”라고도 했습니다. 하세가와씨는 이런 그의 모습에 정말 화가 났다고 합니다. “용서받을 수 없는 짓이에요. 그들은 지금까지도 이렇게 말하고 있어요.” 그는 야마시타 교수에게 이런 메시지를 남김으로써 건강에 대한 의문을 던졌습니다. “나는 당신의 기니피그가 되지 않을 겁니다.” (*기니피그는 쥐목에 속하는 작은 짐승으로, 주로 생물학이나 의학의 실험용으로 쓰입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삶의 기록

그는 여전히 각종 사건들의 전후 순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음과 같이 말입니다.: 3월 16일, 자녀들과 함께 피난하면서, 아마도 소들을 포기해야 할거라고 말한 날. 3월 19일, 생산한 우유가 안전하지 않다고 판정받은 날. “이타테 사람들에게는 어떤 피난 명령도 없었어요. 그저 우유를 판매하는 것만이 금지됐지요.” 4월 16일, 이타테가 피난지역으로 선포됐습니다. 4월 22일, 대피령이 떨어졌습니다. 

그의 걱정은 방사능 수치만이 아닙니다. 피해자로서 현재 처한 그들의 상황을 우려합니다. “그들은 이미 재난이 끝났다고 말하고 있어요. 피해자들의 상황에 대한 어떤 보고도 더이상 없지요. 피해자들의 상황을 알린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우리가 잊혀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원자력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는 꼭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더러운 것을 다음 세대에 물려줘서는 안됩니다.” 그는 “정부와 당국들이 어떻게 처신하는가, 시민들을 불필요한 방사능에 어떻게 노출시키고 있는가”를 가장 눈여겨보아야 할 점으로 꼽았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 세계에 전하고 싶어 합니다. “"현상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눈을 크게 뜨고, 이면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살펴봐 주십시오.” 

석양이 하세가와씨의 버려진 외양간으로 떨어졌습니다. “인재, 고통, 방사능 노출, 소들”이라 쓰인 편평하고 가벼우며 뾰족한 나무조각 하나가 외양간 한 켠에 놓였습니다. 본래 전통적으로 불교도들이 죽은자를 기리고자 묘지에 세우는 나무조각이었습니다. 하세가와씨는 그것을 자기 소들을 위해 만들었습니다. 50마리의 소가 있었던 그 곳에, 소는 없고 슬픈 글자들만이 덩그러니 자리하고 있습니다. 은색 환풍기와 전기판넬, 스위치에 쳐진 거미줄들이 모든 것이 작동하지 않음을 알리고 있습니다. 분필로 쓴 23-3-11라는 숫자. 일본식 시간인 그 숫자는 참사가 벌어진 날을 의미했습니다. 뒤이어 적혀있는 2:46는 걷잡을 수 없는 파국의 시간, 바로 지진이 시작된 시간이었습니다. 시간을 잃어버린 후쿠시마 사람들에게 그 이후의 시간은 더이상 흘러가지 않은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