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4월, 여러분은 무엇을 하고 있었나요? 27년 전 우크라이나 체르노빌에서는 원전폭발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같은 해에 태어난 안냐 페센코는 4살이 되었을 때, 똑바로 앉으려 애쓰다가도 기절하는 일이 빈번했습니다. 어머니인 발렌티나는 걱정되어 의사에게 데려갔고 그때 안냐의 뇌에서 종양을 발견했습니다. 암종양은 제거되었지만 안냐는 회복되지 않았고 많은 의사를 대한 탓에 흰 가운만 보면 소스라치게 놀라곤 합니다.

안냐는 체르노빌 원전사고로 방사능에 심하게 오염된 마을에서 1986태어났습니다. 안냐는 4때부터 암에 걸렸고 2000재발한 뇌종양으로 고통받고 있습니다.

의료진은 안냐의 아버지 바체슬라프가 체르노빌 사고로 오염된 마을 출신이기때문에 안냐가 ‘체르노빌 확인증’을 받아야 한다고 결정했습니다. 확인증에는 “이 사람은 고멜 지자체 제 18조 규정에 의거, 벨라루스 정부가 체르노빌 재앙의 피해자들에게 주는 특권을 가질 권리가 있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이 문서를 가진 사람은 일부 의료시설, 무료 의약품, 전기 수도세 등에 대한 50%감면, 그리고 무료 대중교통 사용의 혜택을 받을 수 있습니다.

안냐는 15살이 되었을 때도 여전히 노력 중이었습니다. 체력이 받쳐줄 때는 방문 선생님과 함께 공부를 하기도 했습니다. 가끔 안냐는 병원에 긴급히 후송되어 17일 간 집중치료실에서 인공호흡기에 의지합니다. 이런 과정은 2000년 뇌종양이 다시 나타난 이후로 거의 일상이 되었습니다.

이웃에 사는 두 소년이 안냐의 가장 친한 친구들입니다. 안냐의 어머니는 안냐가 얼굴을 잘라내버린 소녀 그림을 보여주며 말합니다. “지난 가을에 안나의 머리카락이 빠지기 시작했죠.” 여자친구들은 더이상 집에 놀러오지 않습니다. 어리고 건강한 아이들이 자신들과 다른 사람을 대하기 두려운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릅니다.

안냐는 안마사가 혈액순환을 위해 다리를 주무르자 고통에 흐느낍니다. “약물을 투여한 곳이 특히 더 아플 겁니다. 약이 잘 들어가도록 힘주어 눌러야만 했거든요.” 안냐의 어머니가 설명합니다. “울지말거라 안냐. 울지마” 발렌티나는 반복해 말하며 딸을 진정시키려 합니다.

그녀는 딸의 이름과 비슷한 안나 성녀의 사진을 쥔 채 안냐의 귀에 대고 기도합니다. 밤이 되면 발렌티나와 바체슬라프는 딸의 침대 바로 옆 바닥에서 잡니다. 욕창때문에 매 15분마다 안냐의 자세를 바꿔줘야 하기 때문입니다. 안냐는 모든 것에 도움이 필요합니다. 가족 중 그 누구도 충분히 잠을 잘 수 없습니다. 세명의 가족 모두가 지칠대로 지쳤습니다.

“하루 종일 깨어 있으려면 커피를 입에 달고 살수밖에요. 정말 피곤하답니다.”

간호사가 방문해 안냐를 돌보느라 분주할 때에서야 발렌티나는 시간이 나 딸의 사진을 모아둔 앨범을 보여줍니다. 앨범에는 안냐가 스코틀랜드로 여행간 사진, 러시아 인형처럼 차려입은 모습들이 들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여행한 농가에서 안냐는 두꺼운 코트로 둘러싸인 채 모자를 쓰고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습니다.

내용은 책의 일부를 발췌한 내용입니다. Nuclear devastation in Kazakhstan, Ukraine,Belarus, the Urals and Siberia. © (Photography) 2006 Robert Knoth, ©(Text) 2006 Antoinette de Jong

체르노빌 사고 당시 원전 측은 전력이 나갔을 경우 냉각수 펌프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테스트 중이었습니다. 사고가 났을 때 누출된 방사능량은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 때보다 더 많았습니다. 1989년까지 60~80만 명의 인력이 방사능 제염작업에 동원되었지만 이 중 30만 명은 한 사람이 일년 동안 노출되는 방사능량의 500배 이상에 노출되었습니다. 전체 사망자의 수는 여전히 논란 중이지만 3개의 영향지역에서만 약 2만5천 명의 인력이 사망했다는 정부기관의 추정치도 있습니다. 체르노빌 사고가 발생하고 3년이 지나서야 러시아는 체르노빌 원자력단지에 짓던 5번째와 6번째 원전 건설을 중단했고 14년이 지난 후에야 모든 원전단지를 폐쇄했습니다.

2011년 안냐를 다시 방문했을 때 그녀의 상태는 많이 호전된 편이었습니다. 뇌종양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지만 방문선생님의 도움으로 고등교육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간을 여전히 침대에서 보내고 걸을 수 없어 휠체어에 의지합니다. 어머니 역시 관절염으로 건강이 악화되었고 모녀를 돌보기 위해 아버지는 직장을 그만둬야 했습니다. 그들의 생활은 대부분 집안에서만 이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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