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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편지 3. 남극의 불청객 '세종'

글: 그린피스 항해사 김연식
남극 크릴 어업이 최대 호황을 맞이하면서, 크릴의 개체 수가 8할 정도 감소한 것으로 추정하는 보고서가 나왔습니다. 지금 우리는 남극 동물들의 먹이를 빼앗고 있습니다. "세종 호, 아틱 썬라이즈 호입니다. 들립니까." 크릴을 한가득 끌어 올린 어선을 부르던 이 날 남극해의 두 가지 면을 봤습니다. 남극 생명의 찬란한 향연과 그 너머에 있는 불청객 어선들.

사방이 고래입니다. 운전하는 저는 배를 어느 방향으로 돌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한 녀석을 피해 오른쪽으로 돌면 다른 놈이 물 밖으로 철퍽철퍽 튀어나옵니다. 빈자리를 찾아보지만 멀건 가깝건 온통 고래가 뿜어낸 입김입니다. '쿠아아~.' 거대한 허파가 뿜어내는 깊고 웅장한 숨소리에 선원들은 얼이 빠집니다. 불과 10m, 20m 앞에서 고래가 헤엄칩니다.

청량한 바람결이 설핏 비릿합니다. 남극의 찬 공기에 고래가 뿜은 숨결이 담겨 있습니다. 그 분무가 얼굴을 덮칩니다. 저도 숨을 깊이 들이마십니다. 방금 이 공기가 머물렀던 포유류의 거대한 허파를 상상합니다. 고래와 나는 같은 공기로 숨 쉽니다. 환상적입니다. 대자연과 한 몸이 된 기분입니다.

고래 도록을 뒤져 이름을 찾습니다. 온몸에 크고 작은 혹이 선명합니다. 헤엄치는 모양이나 길고 하얀 날개 지느러미를 보면 혹등고래가 맞습니다. 그런데 배가 하얗고 겨드랑이가 노랗습니다. 고래 수백 종이 담긴 책을 샅샅이 뒤져도 똑같은 그림은 없습니다. 혹등고래의 일부 종 같습니다. 찾으면 나오리란 건 착각이었습니다. 책이 세상 모든 걸 담지는 못하고, 자연은 우리가 헤아리는 것보다 크다는 걸 거듭 깨닫습니다.

혹등고래<혹등고래>

고래는 입을 벌리고 몸을 비틀어 사방을 휘젓습니다. 수면에 하얗게 거품이 일더니 작고 붉은 것들이 떠오릅니다. 그러면 주변에서 기회를 엿보던 새들이 잽싸게 물속으로 뛰어듭니다. 크릴입니다. 고래와 새가 크릴을 사냥하는 중입니다.

우리 국민에게 쌀이 주식이듯, 크릴은 펭귄과 고래, 물범, 앨버트로스 등 남극 생명체의 기초 먹잇감입니다. 고래 숨소리, 새의 바쁜 날갯짓, 공기 중에 퍼진 고래 입김으로 한바탕 난리입니다. 남극은 살아 있습니다. 문득 이 거대한 파티의 불청객이 된 것 같아 멋쩍습니다.

멀리 불청객이 하나 더 있습니다. 낯익은 이름의 어선입니다. '세종 호.' 우리나라에서 온 크릴 어선입니다. 길이 120m, 폭 20m, 재화 중량 3천417톤. 괴물 같이 큰 어선이죠. 이번 그린피스 남극 캠페인을 이끄는 틸로 마아크(Thilo Maack, 독일)가 세종 호를 보더니 급히 움직입니다. 틸로는 무전기를 내게 들이밀고 통역을 부탁합니다.

남극 트리니티 섬 인근에서 발견한 한국 크릴 어선 '세종 호'<남극 트리니티 섬 인근에서 발견한 한국 크릴 어선 '세종 호'>

- 세종 호, 여기는 귀선 전방 3마일에 있는 아틱 썬라이즈 호입니다.
- 세종 호, 아틱 썬라이즈 호입니다. 들립니까.

거듭 불러보지만 답이 없습니다. 국제 규정상 모든 선박은 무전기(VHF) 16번 채널을 늘 켜 놓아야 합니다. 세종 호는 저희 무전을 들었을 겁니다. 그린피스의 캠페인 소식을 듣고 대응하지 않기로 작정한 모양입니다. 무전을 거듭하던 틸로는 작정한 듯 말합니다.

- 자, 보트를 띄웁시다.

아틱 썬라이즈 호 전체가 비상입니다. 모든 선원이 나와서 보트를 묶어 놓은 줄을 풀어냅니다. 활동가들은 플래카드와 등반 장비를 챙깁니다. 세종 호의 어업을 저지하기 위해 어선의 현 측에 오를 계획입니다. 오래 버틸 요량으로 생존 캡슐까지 준비했습니다. 이 시간을 기다리며 등반을 연습한 활동가들의 눈빛이 반짝입니다. 책임자 틸로는 사뭇 긴장한 표정입니다. 금세 보트 세 척을 띄우고 활동가들을 태웠습니다. 선원들은 이제 세종 호로 달려갈 신호만 기다립니다.

- 그물이 올라왔다!

선장 다니엘 리조티 (Daniel Rizzotti, 아르헨티나)의 말에 쌍안경으로 보니 100m도 넘어 보이는 검고 커다란 그물이 올라옵니다. 안이 가득 찬 소시지처럼 빵빵합니다. 어마어마한 양의 크릴을 잡아 들입니다. 덤프트럭보다 큰 그물은 기차처럼 줄줄이 세종 호의 갑판으로 올라옵니다. 그물을 올리는 세종 호 옆으로 아무것도 모르는 혹등고래 한 무리가 지나갑니다.

그물이 올라왔다는 건 이미 늦었다는 것. 활동가들을 태우고 세종 호까지 가려면 15분이 필요합니다. 그 사이 세종 호는 그물을 걷고 잽싸게 도망갈 겁니다.

- 10분만. 10분만 서둘렀더라면….

틸로가 자책하듯 아랫입술을 깨뭅니다. 지난 3월 17일 남극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저는 이날 남극해의 두 가지 면을 봤습니다. 남극 생명의 찬란한 향연과 그 너머에 있는 불청객 어선들. 남극해에는 우리나라 세종 호를 비롯해 노르웨이, 중국, 칠레, 우크라이나에서 온 어선들이 있었습니다.

그린피스 활동가들이 크릴 어선 모르 소드루체스토 호에 "남극해 보호" 배너를 설치하고 있다<그린피스 활동가들이 크릴 어선 모르 소드루체스토 호에 "남극해 보호" 배너를 설치하고 있다>

닷새 후인 23일. 세종 호는 멀리 도망갔고, 대신 우리는 근처에 있던 우크라이나 크릴 어선 '모르 소드루체스토 호'를 상대로 같은 계획을 실현했습니다. 배 측면에 올라 '남극해를 보호하자'는 플래카드를 걸고 선체에 생존 캡슐을 매달아 어업을 지연시켰습니다. 이 장면은 우리나라를 비롯한 전 세계 뉴스를 통해 실시간으로 퍼졌습니다.

크릴은 고래와 펭귄 등 남극 생물의 먹이입니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이 우리에게서 쌀을 수탈했던 것처럼, 지금 우리는 남극 생명체의 먹이를 빼앗고 있습니다. 크릴은 공기 중에서 흡수한 이산화탄소를 배설물과 함께 심해에 가라앉힙니다. 영국 남극 자연환경연구소(British Antarctic Survey)는 크릴이 매년 이산화탄소 2천 300만 톤을 흡수한다고 설명합니다. 영국 전체 가정집이 1년 동안 배출하는 온실가스에 버금가는 양입니다. 남극 크릴의 개체 수가 감소하면 지구온난화는 더 빨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남극 크릴<남극 크릴>

남극 크릴어업은 1961년 이래 최대 호황입니다. 크릴을 이용한 오메가3 지방산 건강보조제와 낚시 미끼, 반려동물 사료 등 수요가 급증한 탓입니다. 노르웨이와 중국, 우크라이나, 칠레, 그리고 우리나라 등이 이 바람에 가세했습니다. 이런 까닭에 남극 크릴은 위기에 처했습니다. 1970년대 이후 크릴의 개체 수가 8할 정도 감소한 것으로 추정하는 보고서가 나왔을 정도입니다.

그린피스는 올해 10월에 열리는 남극해양생물자원보존위원회(이하 CCAMLR)에서 남극해 일대가 해양보호구역으로 지정되기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남극 크릴을 보호할 수 있습니다. 남극에서 크릴을 잡는 건 수탈인 동시에 기후변화를 악화시키는 일입니다. 어선의 기름 유출, 화재, 좌초 등 사고의 위협이 청정 남극을 위협하기도 합니다.

우리나라는 지난 40여 년간 남극에서 크릴을 잡아 왔습니다. 전 세계에서 남극 크릴 어획량이 세 번째로 많은 우리는 CCAMLR 스물다섯 회원국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가 남극을 보호하는 데 앞장설 수 있도록 환경을 사랑하는 시민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고래와 함께 숨 쉰 이날을 저는 잊을 수 없습니다. 소중한 남극이 우리 손에 달려 있습니다.

글: 그린피스 항해사 김연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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