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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피스의 기원

글: 렉스 웨일러

2021년 9월 설립 50주년을 맞이하는 그린피스 환경운동의 역사는 알래스카 핵실험 중단을 위한 최초의 캠페인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50주년 기념일을 앞두고 그린피스는 초기 캠페인과 그 이후에 얻은 교훈, 위험, 실패 및 성공 사례를 돌아보려 합니다. 그린피스의 시작을 소개하기 위해서는 1971년 캐나다 밴쿠버에서 그린피스를 탄생시킨 문화적 맥락과 상황, 여러가지 사회 운동 등을 되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생태 운동의 태동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세계적 시대정신은 평화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와 유럽/미국 동맹국 간의 냉전은 한국, 베트남, 팔레스타인, 쿠바 등지에서의 수많은 대리전과 냉혹한 핵 군비경쟁으로 이어졌습니다.

 

1950년대에는 전 세계적으로 ‘방사능 낙진’, ‘유전자 변이’와 같은 생소한 용어가 일반인들에게도 들려 오기 시작했고 핵 재앙에 대한 공포가 세계를 덮쳤습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을 경험한 일본에서 핵군축 운동이 시작되었고 평화주의와 연결되면서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었습니다.

 

핵폭탄의 위협에 영향을 받은 수백만 명 중에 미국 로드아일랜드, 프로비던스에 살던 어빙과 도로시 스트라스미치(후에 ‘스토’로 성을 개명함) 부부가 있었습니다. 도로시는 로드아일랜드 최초의 사회복지사 노조를 조직하고 주 노동 조합의 회장으로 일했습니다. 어빙은 변호사이자 재즈 애호가로, 음악을 하는 흑인 친구들의 권유로 전미유색인종지위향상협회(NAACP)에 가입했습니다. 도로시와 어빙이 1953년에 결혼할 때 당시 NAACP 본부에서 피로연을 하기도 했습니다. 부부는 퀘이커* 교도 모임에 참석했고 후에 여권 신장과 노예제 폐지 운동을 하던 퀘이커 교도 해리엇 비처 스토의 성을 따 ‘스토’라는 성을 사용하기 시작습니다. 20년 후에는 이들 부부가 그린피스 설립을 돕게 됩니다. 스토 부부는 투사였습니다. 도로시가 노예제 폐지론자 프레데릭 더글러스의 말을 인용해, “사람들이 무엇에 굴복할 지만 알아내십시오. 그러면 그들에게 가해질 불공정과 부당함이 어느 정도일지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캐나다인 벤 메트캐프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이를 속이고 영국 공군에 입대했습니다. 메트캐프가 인도에서 영국군에 복무하던 당시, 인도 국민회의 지도자 마하트마 간디가 영국의 전쟁에 협조하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는 간디의 평화주의 운동에 공감했습니다. 메트캐프와 그의 폭격기 조종사는 친간디 마을 폭탄 투하를 명령받았지만, 이를 어기고 휴경지에 폭탄을 떨어뜨렸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그 모습을 밑에서 지켜보고 손을 흔들었죠. 영국 공군 신분이었던 그들의 이러한 저항은 영국법 상 반역 행위였겠지만 메트캐프와 조종사는 간디의 견해를 지지했습니다. 전쟁 후 메트캐프는 캐나다 위니펙에서 기자가 되었고 동료 기자였던 도로시 해리스와 결혼했습니다. 부부는 1956년 밴쿠버로 이주했고 두 사람 모두 그린피스 설립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밥 헌터는 위니펙의 초등학교에서 폭탄과 방사능 낙진에 대해 배웠습니다. 청소년 시절, 그는 “소련의 핵 공격은 북미의 상당 지역을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으로 만들 수 있다”는 제임스 개빈 장군(미국의 전략 이론 전문가)의 말에 영감을 받아 핵재앙 이후의 문명에 관한 미래주의 단편소설, ‘폭격 이후(After the Bomb)’를 썼습니다. 헌터는 11학년을 마친 후인 1958년에 학교를 그만두고 작가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헌터는 21세이던 1962년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Silent Spring)’을 읽고 생태라는 새로운 아이디어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카슨의 "자연에는 아무 것도 혼자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은 그가 세상을 보는 방식을 바꾸었습니다. 군국주의를 멈추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자연을 대상으로 벌어지는 또 다른 전쟁을 막아야 했습니다.

 

한편, 젊은 생물학자 배리 커머너 박사는 세인트루이스에서 어린이들의 유치를 수집해 인체에 흡수된 핵폭발의 발암성 부산물인 스트론튬-90 지수를 기록했습니다. 군국주의가 치명적인 오염의 근원임을 보여준 것입니다. 이로써 평화운동과 생태운동이 결합되기 시작했습니다.

 

*17세기 영국의 폭스(G. Fox)가 일으킨 프로테스탄트의 한 종파. 교리나 형식보다 내면의 빛을 중시하며 노예제 철폐, 여권 신장, 형법 개혁 등 특히 사회 개혁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찾아 보세요!

1966년, 어빙과 도로시 스토는 미국의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여 두 자녀 로버트, 바바라와 함께 캐나다 서부 해안의 밴쿠버로 이주했습니다. 이들 부부는 퀘이커 교도 모임에 참석하고 미국 대사관으로 향하는 평화 행진을 주도했으며 당시 밴쿠버 썬(Vancouver Sun)지의 밥 헌터, CBC기자이던 벤과 도로시 메트캐프와 서신를 주고받았습니다. 또한 원주민 권리 단체 및 캐나다 여성의 소리(Voice of Women)의 디노 버밍엄, 릴 드섬과 함께 일했습니다.

 

헌터는 생태학, 민권, 평화 운동에 대한 신문 칼럼을 썼고 그의 첫 논픽션 저서인 ‘무정부의 적들(The Enemies of Anarchy)’을 집필했습니다. 이 책은 레이첼 카슨을 통해 배운 ‘상호 관계에 대한 자각(consciousness of interrelationships)’을 다루는데 헌터는 이것이 사회적 다양성, 양성 평등, 전자 미디어 및 생태를 아우르는 문화적 혁명이라고 믿었습니다. 헌터는 다음에 올 사회의 큰 변화는 생태 혁명일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었고 친구들에게 “이제 생태가 대세”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암치카섬으로 가는 배에서 타자를 치고 있는 밥 헌터

벤과 도로시 메트캐프는 나치와 협력한 것으로 의심받던 스웨덴 사업가 악셀 베네그랜이 수력발전 댐 건설을 위해 브리티시 컬럼비아 원주민 자치구역을 사취하려한 계획을 폭로했습니다. 밴쿠버 프로빈스(Vancouver Province) 신문에 실린 벤 메트캐프의 기사를 토론토 언론이 보도하며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이에 잭 피커실 자유당 내각 장관이 불쑥 내뱉은 “나는 병든 인디언에게 관심없다”는 말이 캐나다 전역에서 공분을 일으켰고 이 사건으로 메트캐프는 언론계의 유명인사가 되었습니다.

 

1969년 벤 메트캐프는 밴쿠버 근처의 하우 사운드로 낚시를 갔다가 포트 멜런 펄프 공장의 굴뚝에서 뿜어져 나오는 악취를 목격했습니다. 몇 주 후, 그는 산림 위원회 회의에 참석해 정치인들에게 하우 사운드의 공기 오염에 대한 대책을 물었습니다. 업계 임원이 “받아들여야 합니다”라고 하자 메드캐프는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메트캐프 부부는 $4,000의 사비를 들여 밴쿠버에 12개의 광고판을 설치했습니다. 두 개의 파도가 나선형 미로로 합쳐지는 형상의 환경을 표현하는 로고도 만들었습니다. 벤 메트캐프는 친구들에게 “회사나 상품을 홍보할 수 있다면 아이디어도 홍보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광고판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습니다:

생태?

찾아 보세요! 당신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생태운동이 이렇게 밴쿠버에서 태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린 피스(Green Peace)

나는 1965년에서 1973년까지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여 캐나다로 넘어온 50,000명의 미국 병역 거부자 중 한 명이었습니다. 나는 곧 헌터와 스토 부부 같은 평화 운동가를 만났습니다. 당시 밴쿠버는 다양성의 도시였습니다. 중국인 및 일본인 공동체가 번성했고, 불교 사원과 티베트 명상센터, 퀘이커 교도들, 비트제너레이션*의 시를 읽는 커피하우스, 귀농운동을 하는 농부, 자연주의자, 환경 보호 활동가들의 급진적인 네트워크도 있었습니다.

 

짐과 마리 볼렌은 아들 랜스와 폴의 징병을 피하기 위해 밴쿠버에 왔습니다. 뉴욕 웨스트 브롱크스 출신의 짐은 메트캐프와 마찬가지로 미 해군에서 복무한 바 있어 원폭 후 일본을 목격했습니다. 그는 펜실베니아의 퀘이커 교도 모임에서 시에라 클럽(1892년 탄생한 미국의 환경단체) 회원이자 자연 일러스트를 그리던 마리를 만났습니다. 밴쿠버에서 둘은 스토 부부를 만나 가까운 친구가 되었습니다. 

 

22세의 빌 다넬은 이스트 밴쿠버의 노동자 계층 거주 지역을 순회하는 “생태 캐러밴”을 만들었습니다. 정부에서 밴쿠버 해변을 가로지르는 고속도로를 계획했을 때, 다넬은 스토 부부, 헌터 부부 등과 함께 불도저 진입을 차단하고 프로젝트를 중단시킨 시위의 조직을 도왔습니다. 이 캠페인을 통해 밴쿠버의 환경운동가들은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의 사건이 이 모든 사람들을 한데 모았습니다. 1969년 11월, 미국은 알래스카 만을 가로질러 밴쿠버에서 북서쪽으로 4,000km 떨어진 외딴 알류샨 열도의 암치카 섬에서 1971년 10월 코드명 ‘카니킨(Cannikan)’이라는 5-메가톤 열핵폭탄 실험을 진행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이 섬은 131종의 해양 조류가 서식하는 곳으로, 야생동물 보호구역으로 보호받아야 할 곳이었습니다. 이전에 있었던 보다 소규모 실험은 리히터 규모 6.9를 기록했고 이로 인해 섬 전체의 야생 동식물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카니킨 핵실험은 그 보다 다섯 배 강력한 규모로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밥 헌터는 핵실험으로 인한 폭발이 캐나다 서부를 집어삼킬 정도의 쓰나미를 발생시킬 수 있다는 위험성을 경고하는 칼럼을 썼습니다. 미국과 캐나다 국경에서 핵실험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여하면서 그는 ‘파도를 일으키지 말라(DON’T MAKE A WAVE)’는 표지판을 만들었습니다. 그 시위에서 헌터와 직접 만난 어빙 스토가 핵실험 중단을 위한 시민 단체를 결성하자고 제안 했습니다. 스토는 여성의 소리의 디노 버밍엄, 빌 다넬, 메트캐프 부부 그리고 볼렌 부부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헌터는 급진적 활동가 로드 마리닝과 폴 왓슨에게 연락했습니다. 그들은 시에라 클럽의 위원회 격인 임시 단체를 만들어 ‘파도방지위원회(Don’t Make a Wave Committee)’라고 명명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습니다.

 

짐과 마리 볼렌은 1958년 핵실험 반대를 위해 캘리포니아에서 필리핀해의 에네웨타크 섬까지 항해했던 퀘이커 교도들의 작은 배, 골든 룰(Golden Rule)호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미국 해안 경비대가 도중에 항해를 저지하고 선장 앨버트 비갈로를 체포했지만, 이 배의 사진이 전 세계에 알려지면서 평화주의 운동을 촉발했습니다. 어느 날 아침 마리 볼렌은 커피를 마시다가 남편에게 “배를 타고 알래스카로 가야 해”라고 말했습니다.

 

같은 날 밴쿠버 썬(Vancouver Sun)지의 기자가 전화를 걸어와 핵실험을 막기 위한 시에라 클럽의 계획이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당황한 볼렌은 “배를 타고 암치카로 가서 핵폭탄에 맞서고 싶습니다”라고 내뱉았습니다. 밴쿠버 썬은 다음 날 이 내용을 보도했고, 이로써 파도방지위원회는 마침내 계획이 생겼습니다.

 

위원회는 유니테리언 교회에서 만나 이 아이디어를 논의하고 기꺼이 이 항해를 할 선장과 배를 찾을 방법을 깊이 고민했습니다. 회의가 끝날 무렵 어빙 스토가 브이(V)자를 해 보이며 “평화”라고 말하자 빌 다넬이 마리 볼렌이 항해 아이디어를 냈을 때만큼이나 즉흥적으로 “녹색 평화(green peace)로 하죠”라고 조용히 답했습니다.

 

‘녹색 평화(green peace)’라는 말은 평화와 생태 운동의 결합을 표현했고 모든 이의 뇌리에 각인되었습니다. 브리티시 컬럼비아 여성의 소리 임원이었던 71세의 릴 드섬이 1970년 3월 ‘알류샨 열도의 핵실험(Nuclear Testing in the Aleutians)’이라는 연구 논문을 썼을 때, 파도방지위원회가 그린피스(Greenpeace) 마크를 달아 이 논문을 출판했고 이것이 세계 최초의 그린피스 책자가 되었습니다.

 

해군 장교로 복무한 바 있는 짐 볼렌은 배를 물색하기 위해 해안가를 돌아다녔습니다. 프레이저 강 부두에서 그는 60세의 존 코맥 선장을 만났습니다. 선장은 아내의 이름을 따서 ‘필리스 코맥(Phyllis Cormack)호’로 명명한 80피트 길이의 넙치 잡이 어선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40년 동안 서부 해안에서 조업을 한 경험이 있었던 코맥은 가을 폭풍우 시즌에 배를 타고 위험한 알래스카만을 건너야 한다는 생각에 당황하지 않았고 배를 전세 내 주는데 동의했습니다. 

 

사진: gp0sttirb 캡션 : 알래스카 클레메투에서 필리스 코맥호를 타고 있는 존 코맥

시에라 클럽이 이 캠페인 아이디어를 거절하자, 파도방지위원회는 독립적으로 일을 진행해 비영리 단체로 등록하고 이 80피트 길이 어선의 출항을 준비했습니다. 코맥 선장은 이 항해를 위해 배를 ‘그린피스호’로 재명명하는 데 동의했습니다.

 

어빙 스토는 캠페인 기금 마련 자선 콘서트를 열기 위해 자신의 평화주의자 친구인 조안 바에즈(미국의 가수이자 인권운동가)에게 연락했습니다. 바에즈는 참석할 수 없었지만 대신 조니 미첼(9개의 그래미를 수상한 미국의 가수)을 소개했고 그가 라이징 스타인 제임스 테일러까지 데려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전설적인 평화주의 음악인 필 옥스와 당시 인기를 누리던 캐나다 밴드 칠리웍도 가세했습니다. 1970년 10월 이 자선 콘서트를 통해 선박 전세금과 기본적인 비용을 충당하기에 충분한 $17,000가 모였니다.

1970년 암치카 자선 콘서트에서 조니 미첼 © George Diack, Vancouver Sun

 

그린피스는 1960년대의 사회적 동요, 민권, 여권, 원주민 권리, 노동자 권리, 평화주의, 생태에 대한 인식이 부상하는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등장했습니다. 첫 캠페인 이후, 파도방지위원회는 새롭게 떠오르는 시대정신을 완벽하게 표현한 ‘그린피스 재단(Greenpeace Foundation)’이라는 이름을 채택했습니다.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1950년대 중반 샌프란시스코와 뉴욕을 중심으로 대두된 보헤미안적인 문학가·예술가들의 그룹. 앨런 긴즈버그, 잭 케루악, 펄링게티, 버로스 등 여러 연령층의 작가와 시인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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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렉스 웨일러는 그린피스 재단의 창립 이사이자 그린피스 재단 최초의 뉴스레터 편집자로, 1979년 국제 그린피스를 공동 창립했습니다. 그의 칼럼은 활동주의와 환경주의에 뿌리를 두고 그린피스의 과거와 현재, 미래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 있으며, 전적으로 본인의 견해에 입각해 집필합니다. 트위터와 개인 홈페이지도 운영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