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버리지 못한 1999년의 청바지
패션이 잊어버린 것을 기억하며: 우리가 가진 것을 지키는 일이 지구를 구할 수 있습니다.
지난주 옷장을 정리하다가, 거의 입지 않는 옷들 아래에 조용히 접혀 있던 1999년의 청바지를 발견했습니다. 세월 속에서 데님은 부드러워졌고, 푸른색은 강가의 돌처럼 옅게 바랬습니다. 점점 커지는 제 몸에는 이제 잘 맞지 않지만, 이 바지는 여전히 예전의 저, 또 앞으로 되어갈 저라는 사람과 잘 맞습니다.
처음엔 기부할 옷 더미에 넣을까 했지만, 왠지 내키지 않았습니다. 마치 제 안의 무언가가, 이 청바지가 아직 들려줄 이야기가 남아 있다고 알려주는 것 같았죠.
이 청바지는 수 많은 휴대폰들보다 오래 살아남았고, 여러 번의 직장을 거쳤으며, 대륙을 넘나드는 여행을 하며 셀 수 없는 디지털 산만함의 시대를 지나왔습니다. 그 바느질 한땀 한땀 속에 물건은 오래 쓰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던 세계가 담겨 있습니다.

제가 1999년에 이 청바지를 샀을 때, 청바지는 오래 입도록 만들어진 것이었습니다. 튼튼한 청바지 한 벌을 갖는다는 것은 그냥 패션 이상의 의미였습니다. 그때는 아직 옷장이 감정적인 유대감을 가지고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옷은 유행을 따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래 입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우리는 완성된 옷보다는 원단을 사 옷을 맞춰 입었습니다. 단골 재단사는 우리의 사이즈를 우리보다 더 잘 알았죠.
쇼핑은 도파민을 쫓는 혼란스러운 소비가 아니라, 계절마다 찾아오는 작은 의식 같은 일이었습니다. 결혼식, 학교 행사, 명절, 휴가, 파티처럼 특별한 순간들마다 옷을 마련했죠. 각각의 옷에는 이야기와 목적, 계절이 있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그 시절은 마치 다른 세기처럼 느껴집니다. 실제로도 그렇지만요. 1990년대 후반은 거대한 폭풍우가 몰려오기 전 마지막 시기였으니까요. 알고르즘도, 마이크로 시즌도, 패션 앞에 ‘패스트’라는 단어가 전염병처럼 스며들기 전 마지막 시기였습니다.
사람들은 기술의 발전으로 세상이 바뀌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저는 우리가 뭔가를 잊어버렸기 때문에 세상이 바뀌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수리하고 수선하는 것이 자랑이었다는 사실을 잊었습니다. 기다림이 기쁨이었던 시절을 잊었습니다. ‘품질’이란 제작자에 대한, 재료에 대한, 그리고 우리 자신에 대한 조용한 존중의 표현이었다는 사실을 잊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망각은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었습니다. 망각은 만들어진 것이었습니다. 시장가치는 기억을 밀어냈습니다. 식사 한 끼 값보다 싸게 새 티셔츠를 살 수 있는데 왜 옷을 꿰매야 할까요? 버리는 게 이렇게 편한데 왜 간직해야 할까요?
신자유주의 경제는 잊어버리면 보상을 줍니다. 왜냐하면 기억하고, 고치고, 간직하고, 수선하는 일들이 판매의 흐름을 멈추고, 이익을 줄이며, 소비의 속도를 늦추기 때문입니다. 문화가 변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서든 판매를 늘리려는 상업적인 전략이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패스트 패션의 대량 소비자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곧 속도의 시대, 마이크로 시즌의 횡포가 시작되었습니다. 마이크로 시즌, 즉 초단기 패션은 한 계절이 가기도 전에 트렌드를 바꾸었습니다. 자라(Zara)는 디자인에서 매장 진열까지 단 2주 만에 이루어지는 모델을 완성했고, H&M은 끊임없는 신상품 폭탄으로 매장을 채웠습니다. 불안은 동경이 되었고 불안정함은 수요가 되었습니다. 패션 잡지와 TV 프로그램, 나중에는 인스타그램과 틱톡이 욕망을 찍어내는 기계가 되었습니다. 패스트 패션은 우리에게 주도권을 약속했지만, 결국 우리를 소모품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작가 조지 오웰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눈 앞에 있는 것을 제대로 보려면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지금 우리 눈앞에는 단순한 진실이 있습니다.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생산하는 경제 속에서 지구는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40년 전, 전 세계 섬유 생산량은 약 4,500만 톤이었습니다. 오늘날 그 양은 1억 톤을 넘어섰고, 대부분은 폴리에스터입니다. 옷의 형태로 바뀐 화석연료죠. 따라서, 패스트 패션은 노동 문제는 물론 화석연료 문제이기도 합니다. 연구에 따르면 바다의 미세플라스틱 가운데 약 35%가 섬유에서 발생합니다. 옷은 이제 지구 생태계까지 잠식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길을 되찾아야 할 때입니다. 그리움이나 추억 때문이 아니라,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문제의 책임은 전 세계에 있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식민화 패턴이 다른 방식으로 반복되고 있는 것이죠. 북반구에서 버려진 옷들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대신 ‘자선’, ‘기부’ 라는 이름으로 이동을 하죠. 파리나 런던에서 버려진 티셔츠는 가나와 세네갈의 해변을 뒤덮고, 카메론, 케냐, 콩고의 매립지를 가득 채웁니다.
그린피스는 오랫동안 이와 같은 쓰레기 식민주의(waste colonialism)를 지적해 왔습니다.
그린피스는 ‘디톡스 마이 패션’, ‘패스트 패션, 느린 독’, ‘독이 든 선물’ 등의 캠페인을 통해 글로벌 패션 산업에 의한 폐기물 실태를 드러냈습니다. 이 캠페인들은 패스트 패션이 생산 단계에서부터 구매에 이르기까지 모든 단계에서 사람과 지구 모두에게 피해를 준다는 사실을 알렸습니다.
우리는 자원이 버려지지 않고 계속 순환되게 만드는 ‘순환경제’를 주장해 왔습니다. 또한, 더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후 정의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재활용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속가능한 유일한 옷은 바로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옷입니다.
이 글을 쓰며, 저는 르귄의 소설 속 문장을 떠올렸습니다.
“온전해진다는 것은 일부분이 된다는 뜻이며, 진정한 여행은 돌아오는 것이다.”
그 청바지를 펼칠 때마다, 저는 젊음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가는 시간, 양심, 느린 패션으로 돌아갑니다. 물건이 가치와 기억을 담을 수 있다는 믿음의 시대로 말이죠.
이 바지는 지속가능성은 복잡한 전문 용어가 아니라, 관계와 애정이라는 것을 상기시켜줍니다. 과거의 소비 방식을 기억하는 것은 과거에 얽매이는 것이 아닙니다. 균형을 다시 배우는 것이죠. 그리고 이는 패션이 더 이상 지구를 소모시키지 않는 미래를 만들어가는 시작일 것입니다.
어쩌면 진짜 질문은 제가 왜 1999년의 청바지를 아직 가지고 있는지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왜 우리는 아무것도 간직하지 않게 되었는지가 더 중요한 질문일지도 모릅니다.
무언가를 간직한다는 것은, 모든 것을 쉽게 내려놓으라고 말하는 세상 속에서 의미를 붙잡는 일입니다.
저는 이제 그 청바지를 입지는 않지만 여전히 가지고 있습니다. 그 청바지에게 아직 미래가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제 딸에게 물려주려 합니다. 그녀의 세대에서는 어쩌면 보기 어려울지도 모르는 높은 품질도 함께 말이죠. 그녀는 청바지 한 벌 이상의 것을 물려받게 될 것입니다. 한때 ‘가치’란 인내를 의미했다는 것을, 아끼고 보살피는 것이 하나의 저항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언젠가 제 아이들이 이 청바지를 받게 될 때면, 우리가 간직하기로 선택한 것은 곧 우리가 지키기로 선택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지도 모릅니다. 지구와 과거, 그리고 더 나은 미래의 가능성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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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리 케이타 박사 그린피스 아프리카 사무총장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