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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치카: 첫 항해

글: 그린피스

“배를 타고 가서 핵실험에 맞서는 건 어떨까요?”

처음에는 그저 상상이었습니다. 마리 볼렌이 어느 날 아침 커피를 마시면서 무심코 해본 말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주변에 느슨하게 나마 연대를 형성하고 있던 퀘이커 교도, 평화주의자, 환경운동가, 기자, 히피들은 엄청난 아이디어를 듣고 그냥 흘려버릴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몇 주 후 파도방지위원회에 – 그때까지는 여전히 이렇게 불렸음 – 계획이 생겼습니다. 마리의 남편 짐 볼렌은 “미국이 핵실험을 강행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를 끌어내야 할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초반에 계획 실행을 위한 열띤 회의를 마치고 나가면서 어빙 스토가 습관대로 손으로 V를 그리고 “평화”라고 말하자, 평소 조용한 성격의 캐나다 환경운동가 빌 다넬이 즉흥적으로 “녹색 평화(그린 피스 green peace)로 하죠”라고 화답했습니다.
첫 기금 모금 행사를 위한 배지에 넣기에 두 단어가 너무 길어서 단순하게 두 단어를 하나로 합치면서 그린 피스(Green Peace)가 그린피스(Greenpeace)가 되었습니다.

콘서트

이제 우리의 이름은 생겼지만 25센트 짜리 배지를 팔아서 배를 살 만한 돈을 벌 수는 없다는 것이 이내 분명해 졌습니다. 그 때 누군가 록 콘서트를 열자는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여기 저기 전화를 돌렸고 결국 조니 미첼이 자신이 공연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칠리웍과 필 옥스의 참석도 확정되었고, 그 후 조니도 다시 전화를 걸어와 특별 게스트로 제임스 테일러를 데려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들 중 누구도 그 공연을 위해 돈을 받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렉스 웨일러는 그의 그린피스 전기에서 “콘서트는 매진, 그해 최대의 카운터 컬처(반문화, counter culture) 행사였다”고 회고했습니다. 밴쿠버 퍼시픽 콜로세움을 가득 채운 16,000명의 관객은 감동에 젖은 채 공연장을 떠났습니다.
콘서트의 성공 이후 회의 참석자가 급증하고 돈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10월 말까지 $23,000 이상이 모금되었고 그린피스는 출항 준비를 마쳤습니다.

항해

그러나 항해는 재앙과도 같았습니다. 배는 1971년 9월 15일 해질 무렵 항구를 떠났으나 내부에서 긴장이 고조되었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지도 못했고 원하는 곳에 있지도 못했어요. 그리고 그것 때문에 엄청나게 싸웠죠. 우리가 행하고 말했던 모든 것이 감당하기 어려운 권력 투쟁으로 빨려 들어갔어요.”

 

“퀘이커 교도들을 본받아 도덕적인 모범이 됨으로써 세상을 구해야 할 우리가 서로를 공격하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고, 서로 자존심을 굽히지 않아 처음부터 끝까지 심각하게 분열되어 있었어요.”

심지어 그린피스호는 암치카 핵실험 부지 근처에도 못가서 미국 해군에 저지 당했습니다.

 

그러나 실패한 모양새는 아니었습니다. 암치카 항해는 많은 대중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언론은 많은 역경에도 불구하고 항해를 시작한 소수의 활동가들에게 열광했습니다. 밥 헌터가 초기 그린피스 액션을 위해 생각해 낸 접근법인 ‘미디어 마인드 밤(media mindbomb 세계에 큰 충격을 주어 시민들의 행동으로 이어지게 하는 이미지)’이 처음 실현된 것입니다. 

훨씬 더 큰 이야기의 시작

밥 헌터는 후에 “나의 걱정은 기우였음을 나중에 깨달았습니다. 항해 이후에 느꼈던 절망감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었음을 시간이 증명했어요. 그 항해는 그 누가 상상했던 것보다도 성공적이었습니다”라고 썼습니다.

이들이 저지하려 했던 핵실험은 결국 진행되었지만 그 이후로 계획되었던 실험들은 취소되었습니다. 그 항해가 있은 지 5개월 후, 미국은 암치카 핵실험 프로그램 전체를 중단시켰고 암치카 섬은 후에 조류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습니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역사가 어떤 결론을 내리든, 그 항해 자체가 남긴 유산은 어선을 타고 항해한 사람들만이 아니라 전 세계가 사랑하고 미워하게 된 그린피스입니다.”

오늘날 그린피스는 세계에서 가장 인지도가 높은 환경 단체로 55개국 이상에 사무소를 두고 전 세계에 290만여 명의 회원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암치카는 훨씬 더 큰 이야기의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밥 헌터의 회고

암치카섬으로 향하는 필리스코맥호 위의 밥 헌터(왼쪽)와 벤 메트카프

밥 헌터는 1971년 미국 핵무기 실험을 저지하기 위해 알류샨 열도의 암치카 섬으로 향하는 그린피스의 첫 항해에 승선했습니다. 목적지까지 반 정도가 남았을 무렵, 닉슨 대통령이 핵실험을 한 달 연기한다고 발표했습니다.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 대부분은 돈이 떨어지거나 휴가 기간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었고 항해를 계속할 지, 돌아갈 지에 대한 격론이 벌어졌습니다. 아래 내용은 당시 상황에 대한 밥 헌터의 회고입니다.

암치카 항해에서 돌아와 그에 대한 책을 쓰려고 앉았을 때, 나는 우리가 패배했다고 확신했고 화가 났습니다. 핵실험을 실제로 방해할 수 있었던 최고의 기회를 순전히 어리석음과 - 부드럽게 표현하자면 배짱이 부족해서 - 날려 버렸습니다. “암치카로 가다가 중도 포기(Cop-out on the Way to Amchitka )”가 내 머리 속에 떠오른 책 제목이었습니다. 나의 의지 부족도 실패의 큰 원인이었습니다. 게다가 항해를 계속하려는 싸움을 잠재의식 속에서 일부러 포기했다는 것이 괴로웠습니다. 내가 죽거나 세상이 멸망할 때까지 그 괴로움을 안고 살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뿐만 아니라 인생 최악의 글쓰기 딜레마를 겪고 있기도 했습니다. 연습장에 공상 과학 소설을 쓰기 시작하던 어린 시절부터 나는 ‘경험’을 찾고 있었어요. 열정 가득한 젊은 작가들이 그렇듯, 나도 쓸 말은 많았지만 내 생각을 표현할 맥락이 부족했어요. 책은 좀 읽었지만 전염병이나 십자군 전쟁, 국내에서 최근 벌어진 전쟁 같은 건 없었습니다. 1950년 레드리버(Red River) 대홍수 당시에도 우리 가족은 제방이 무너지기 전에 대피했습니다. 전후 남부 위니펙의 노동자 계층 거주 지역에서는 현실에서 모험을 경험하기란 어려웠죠. 상상이 되실지 모르겠지만 더구나 당시는 캐나다가 그 어느 때보다 무미건조한 시기였거든요. 내가 자라면서 겪은 모험이라고는 평범한 로맨스나 여행 또는 어린 시절의 아슬아슬한 경험이 전부였습니다. 북부의 숲에서 혼자 캠핑도 하고 캐나다 서부와 유럽에서 히치하이킹도 해보고 결혼해서 두 아이를 두었으며 언론계에서 흥미로운 커리어를 시작했고 세권의 책도 출판했지만 1971년 가을 그 운명적인 항해 전까지는 나 자신의 삶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써야만 한다고 느끼게 한 사건은 일어나지 없었습니다. 드디어 그런 일이 일어났는데 그것에 대해서는 쓰지 말아야 했습니다. 대의를 위해서 말이죠.

나 자신이 참여한 일이었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내가 정확히 무엇에 참여했는지도 명확치 않았고 여전히 정의되는 과정에 있었지만 분명한 것은 더 이상 밖에서 안을 들여다 보지 않고 안에서 밖을 내다 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신문 칼럼니스트로 시작했습니다. 다분히 외부자일 수밖에 없는 직업이죠. 그러다 보니 나 자신의 통찰과 글의 진정성 외에는 어떤 것도 책임을 지지 않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있는 그대로 말하라”가 카운터 컬처 기자들의 신조였고 나의 개인적인 좌우명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신생 정치 조직의 핵심적인 일원으로 약간의 힘도 가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역사의 흐름을 바꿀 수 있는 힘인 것처럼 느껴졌었죠. 그 때 일어나야 했던 일은 필리스 코맥호, 즉 그린피스호가 암치트카 섬에 도착해 코드명 카니킨 핵실험을 막기 위해 그 곳에 정박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이 보다 간단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모든 것이 잘못되었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지도 못했고, 원하는 곳에 있지도 못했어요. 그리고 그것 때문에 엄청나게 싸웠죠. 우리가 행하고 말했던 모든 것이 감당하기 어려운 권력 투쟁으로 빨려 들어갔어요. 퀘이커 교도들을 본받아 도덕적인 모범이 됨으로써 세상을 구해야 할 우리가 서로를 공격하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고, 서로 자존심을 굽히지 않아 처음부터 끝까지 심각하게 분열되어 있었어요. 호머 이후 어떤 작가라도 ‘내부 갈등’이라고 표현할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그룹과 함께하겠다는 단합 규칙(Unity Rule)에 초반에 합의했었습니다. 그 운동과의 연대에 과감하게 뛰어든 것이죠. 그래서 기자이자 역사가로서의 자신에게 사실상 재갈을 물렸습니다. 절충을 한 것이지만 어쨌든 나는 그것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불평할 수는 없었습니다. 나는 합의에 따랐고 그린피스의 여정과 운명을 결정할 조타 핸들에 나의 마른 손이 올려져 있었지만 정치인들과 마찬가지로 나는 공개적으로 반대하지 않는데 동의해야 했습니다. 나중에 돌아보니 진행되는 모든 것에 반대했지만 입을 다물고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책을 쓰겠습니까? 정당의 노선은 따르면서 우리가 다 망쳐버렸다는 끔찍한 진실은 말해주는 그런 책을요.

30년이 지난 후, 회색 수염이 하얗게 변한 짐 볼렌이 술을 한 잔 하며 털어놓더군요. 항해하는 내내 선장에게 비밀리에 항해 지시를 했다고요. 수표에 서명하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배를 전세 낸 파도방지위원회의 의장으로서 볼렌은 그렇게 할 법적 권한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수장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린피스와 시위 활동이 구식 위계 구조로 운영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대신 그는 우리 급진적인 젊은 선원들을 통제하기 위해 게임을 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배는 합의에 의해 운영된다는 약속이었습니다. 우리 각자는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이었죠. 이것은 당시 너무나 세련된 권력 공유 형태로 여겨졌고 나는 그것을 존중했습니다.

그러나 모두 거짓이었습니다. 실제로 의사 결정은 내려졌지만 볼렌이 내리는 결정이었죠. 그리고 그는 우리가 모두 침상으로 자러 간 후 그런 결정들을 내렸습니다. 내가 항해 직후에 책을 쓰던 당시에는 볼렌이 막후에서 무엇을 했는지 전혀 몰랐습니다. 우리가 전날 밤 회의에서 합의한 방향과 다르게 배가 움직인 것은 저에게 미스터리로 남아 있었습니다. 볼렌은 우리를 너무나 혼란스럽게 했습니다. 이제는 그의 노련함, 성숙함, 신중함에 경의를 표합니다. 그가 통제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죽었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나 당시에는 그가 겁을 먹고 후퇴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는 그를 리더의 자리에서 몰아낼 음모를 꾸미고 있었습니다. 또 한 명의 성숙한 참전 용사이자 미디어 캠페인의 지휘자였던 벤 메트캐프도 우리를 무사히 집으로 데려오려는 볼렌의 계획의 공모자였습니다. 그도 역시 우리를 집단 자살의 위험에 빠뜨릴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던 거죠. 나는 우리의 실패에 대해 그를 못마땅해 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롬멜을 잡기 위한 사막 작전에도 참전했고 간디 추종자들을 폭격하라는 영국군의 명령에 저항한 적도 있으며 나에게는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경험’의 측면에서도 나보다 훨씬 우위에 있는 사람이어서 삶과 죽음의 문제에 있어서는 반항적이지만 뭘 모르는 젊은이들을 능가할 것임이 너무나 자명했습니다. 그는 사선에서 살아 돌아온 노병이었습니다. 이제야 깨닫지만 천재였습니다. 결국 나는 그의 밑에서 공부했습니다.

필리스 코맥호의 무전기에 대고 말하는 벤 매트캐프와 창문으로 들여다 보는 짐 볼렌

결과적으로 그린피스호의 첫 항해의 운명을 결정한 것은 배의 선장이자 소유주였던 존 코맥이었습니다. 많이 이야기되지 않는 사실이지만 자신의 배를 핵실험 구역으로 몰고가는 일을 수락한 것은 절망적인 경제적 상황 때문이었습니다. 지나고 나서 결정적인 순간에 코맥이 한 일과 하지 않은 일을 돌아보니 흥미롭습니다. 그는 자신의 배와 우리를 모두 살렸습니다. 우리도 모두 집으로 돌아갈 정도의 체면 치레는 한 셈이고요. 

그 항해의 중대한 순간은 우리가 밴쿠버로 돌아가기 하루 전에 찾아왔습니다. 우리가 모두 지칠 대로 지쳐 배에 주저앉아 있는데 볼렌이 기회가 되는 즉시 파도방지위원회의 문을 닫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어차피 임시 단체였고 할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러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어렵게 얻은 미디어 자본을 왜 버리냐는 것이죠. 그러면 위원회는 접고 그린피스 재단으로 재편성하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내가 그린피스를 위해 했던 주된 기여였는데 그 순간을 책에 쓰지는 않았습니다. 그것은 미래의 혁명을 위한 희망을 내비친 것이었는데 스티브스톤 항구에서 상심한 채 약에 취해 우리의 실패담을 쓰던 저는 희망적이지 않았기 때문이죠. 결국 저는 대의에 대한 충성은 접어 두고 본 대로, 아마도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말했습니다. 

나의 걱정은 기우였음을 나중에 깨달았습니다. 항해 이후에 느꼈던 절망감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었음을 시간이 증명했어요. 그 항해는 그 누가 상상했던 것보다도 성공적이었습니다. 핵실험은 결국 진행되었지만 그 이후로 계획되었던 실험들은 취소되었습니다. 우리의 항해가 있은 지 5개월 후, 암치카 핵실험 프로그램 자체가 취소되었고 이것이 냉전 종식의 시작이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역사가 어떤 결론을 내리든, 그 항해 자체가 남긴 유산은 어선을 타고 항해한 사람들만이 아니라 전 세계가 사랑하고 미워하게 된 그린피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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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헌터의 “암치카로 간 그린피스호(The Greenpeace to Amchitka)”에서 발췌

캐나다 아스널 펄프 출판사
ISBN: 1-55152-178-4
2004년 6월 허락을 받아 재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