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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강릉 산불 이재민, 발생 1년 6개월 뒤에도 절반 이상이 외상 후 스트레스 ‘고위험군’

글: 강성원 그린피스 기후에너지 캠페이너
2023년 강릉 산불은 이미 끝난 사건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현재형 재난’입니다. 건물은 복구가 되었지만 행정에 대한 불신으로 또 다른 트라우마가 발생하고, 재난 취약계층은 더 어려운 삶을 살고 있습니다. 1년 6개월이 지났지만 재난은 여전히 이재민의 삶에 머물러 있습니다.

2023년 4월 강릉 산불로 274세대 551명이 삶의 터전을 잃은 지 2년이 채 되기도 전에, 2025년 3월 영남에서 또 한 번 초대형 산불이 발생해 3,848세대 4,458명의 이재민이 발생했습니다. 산림청 집계에 따르면 3월 26일 기준 올해만 이미 206건의 크고 작은 산불이 발생했고, 산불 대응 2단계까지 발령된 대형 산불만 3건에 이릅니다. 그린피스와 카이스트 메타어스 연구센터의 분석에 따르면 우리나라 산불 위험이 시작되는 시점은 산업화 이전보다 전국 평균 13일가량 앞당겨졌습니다. 기후위기로 인해 산불은 더 자주, 더 빨리, 더 크게 찾아오고 있습니다.

“1년 6개월이 지났는데도, 아직 그날에 머물러 있어요”

그린피스 동아시아 서울사무소는 ‘사람들에게 평화를 심리사회지원교육원’, ‘강릉시자원봉사센터’와 함께 2024년 11월부터 2025년 5월까지 강릉 산불 피해 주민 111명을 대상으로 심리 실태조사를 진행했습니다. 조사 시점은 산불 직후가 아니라 발생 1년 6개월이 지난 뒤였지만, 많은 주민들은 여전히 그날의 시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외상이나 충격적인 사건을 경험한 후 개인이 겪는 심리적 충격과 불안, 회피 증상 등을 자가 진단하는 심리 척도인 한국형 사건 충격 척도 개정판(IES-R-K) 평균 점수는 31점(30.8점_소수점 이하 반올림)으로, 국내외 재난 연구에서 보고되는 평균(15~20점)을 크게 웃돌았고, PTSD 고위험군의 평균은 45.6점에 달했습니다. 응답자의 59%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고위험군에 해당했고, 주관적 고통 점수(SUDs_심리적 불편감을 0~10점 척도로 평가) 역시 평균 4.35점(10점 만점)으로 나타나 심리적 불안감이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장기화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시간이 지나면 심리적 충격이 완화되는 것이 일반적이라는 임상적 연구결과와는 달리, 강릉 산불 피해 주민들의 고통은 쉽게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현장에서 설문조사를 함께한 장동현 ‘사람들에게 평화를’ 심리사회지원교육원 이사는 “사소한 소리에도 깜짝깜짝 놀라고, 갑자기 화를 폭발시키거나, 대화 중에도 멍해져 흐름을 놓치는 모습이 자주 보였다”고 말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여전히 “재난이 끝나지 않은 시간 안에 갇혀 있는 느낌”이라고 표현했습니다.

2025년 1월 강릉 산불 이재민 설문조사를 진행하고 있는 심리전문가
2025년 1월 강릉 산불 이재민 설문조사를 진행하고 있는 심리전문가 ©Greenpeace

행정에 대한 불신, 또 하나의 트라우마

이들의 심리적 고통은 단지 불길과 연기에 대한 기억에서만 비롯되지 않습니다. 재난 이후의 행정 절차와 보상 과정에서 겪는 좌절과 불신은 또 다른 상처가 되어 남습니다. 한 이재민은 집이 전소된 뒤, 급하게 대출을 받아 직접 집을 짓고 난 뒤 정부 이재민 대출을 신청하기 위해 어렵사리 서류를 준비했지만 돌아온 답은 “땅만 담보가 되고, 이미 지어진 집은 대출 대상이 아니다.”라는 말뿐이었습니다.​

“국토교통부와 보상 때문에 통화를 하다, 남편이 갑자기 그 전에 있었던 일을 통째로 기억 못하게 됐어요. 구토를 해서 응급실에 갔는데, 의사가 ‘충격이 해결되지 않으니 뇌가 기억을 차단한 것’이라고 하더라고요.” 이 사례는 불투명하고 납득하기 어려운 보상 절차가 단순한 경제적 곤란을 넘어, 주민들의 정신건강을 직접 위협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세입자 유 모 씨의 경우는 회복의 불평등이 얼마나 심각한지 단적으로 드러냅니다. 전 재산을 들여 운영하던 가게가 하루아침에 불에 탔지만, 그가 받은 위로금은 700만 원에 불과했습니다. 같은 건물의 건물주는 5천여만 원의 보상금을 받았고, 정부 보상과 민간 성금 대부분이 ‘소유주’를 기준으로 설계된 탓에 유 씨 같은 세입자는 반복해서 시청을 찾아가 문제제기를 해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자포자기 상태”라는 그는 불안과 우울, 분노 때문에 산불 전까지 활동하던 의용소방대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며 “다시 일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달라”고 호소했습니다.

현재 재난 보상 체계는 건물과 토지 등 부동산 소유 여부를 기준으로 설계되어 있어, 실제로 그 공간에서 살고 일하던 사람들의 삶의 붕괴는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재난은 모두에게 닥쳤지만, 회복의 기회는 자산을 가진 사람에게 더 많이 돌아가는 구조적인 불평등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재난이 취약계층을 더 취약하게 만들 때

장애인 가정의 사례에서는 재난이 취약계층을 얼마나 더 위험한 상황으로 몰아넣는지가 드러납니다. 지체장애가 있는 아들과 함께 살던 현 씨는 산불 당시 아들을 휠체어에 태워 대피하다가 함께 넘어지며 불 속에 고립되었습니다. “급히 나오다가 휠체어가 넘어졌어요. 아이를 살리려고 물 적신 담요를 덮어줬는데, 손가락 끝에 불똥이 퉈서 화상을 입었어요. 저는 팔이 부러진 줄도 모르고 아이부터 살리려고 했어요.”​

불길이 집 주변을 둘러싼 탓에 소방차도 들어올 수 없는 상황에서, 이 가족이 가까스로 구조될 수 있었던 것은 평소 알고 지내던 복지관의 도움 덕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위기는 그날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쓰러진 후유증으로 아들의 거동은 더 어려워졌고, 음식도 제대로 삼킬 수 없어 영양주사가 필요했지만 지원을 받을 창구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응급실에서 퇴원했는데, 아무것도 못 먹는 아이에게 영양주사 하나 제대로 맞춰줄 곳이 없더라고요.”​

재난은 일상의 취약성을 그대로 증폭시킵니다. 아동, 노인, 장애인 및 사회·경제적 취약계층에게는 재난 당시의 대피 지원뿐 아니라, 그 이후 장기간에 걸친 의료·돌봄·생계 지원 체계가 필수적입니다. 이 과정에서 지자체와 정부뿐 아니라, 복지기관과 지역 공동체의 촘촘한 협력이 이들의 생명줄이 됩니다.​

2025년 1월 강릉 산불이 발생한 지 1년 9개월이 지난 시점이지만 설문 당시 여전히 민둥산인 모습
2025년 1월 강릉 산불이 발생한 지 1년 9개월이 지난 시점이지만 설문 당시 여전히 민둥산인 모습 ©Greenpeace

기후재난 시대, 달라져야 할 것들

강릉과 영남에서 반복된 대형 산불은 기후위기 시대의 재난이 더 이상 일시적인 사건이 아니라, 언제든 우리의 일상에 닥칠 수 있는 위험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재난 대응과 보상 체계는 현장의 상황을 반영하지 않고 있으며,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회복될 것이라는 낙관론으로 이재민은 방치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강릉 산불 이재민 심리 조사에서 드러난 것처럼, 재난 발생 1년 6개월이 지난 지금 절반이 넘는 사람들이 여전히 PTSD 고위험군에 머물러 있습니다.

기후위기가 심화될수록, ‘재난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만큼이나 ‘재난 이후 누구도 뒤에 남기지 않고 어떻게 함께 회복할 것인가’를 묻는 목소리가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강릉 산불 이재민들의 이야기는,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장기적 회복 시스템과 견고한 사회적 연대를 구축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지금 당장 준비해야 할 기후재난 대응의 핵심입니다

그린피스는 기후재난에 누구도 남겨지지 않도록 이재민의 상황과 목소리를 잘 기록하여 재난대응, 보상, 심리회복 등 기후재난대응과 관련된 정책을 변화시키고자 합니다. 더불어 기후재난의 근본원인인 기후위기를 막기 위해서도 함께 노력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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